은하수 사이에 두고
“멀고 먼 견우성(牽牛星), 밝은 직녀성(織女星)······맑은 은하수 사이에 두고서 애틋하게 바라만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하네.” ― 한나라 말의 『고시 19수』
은하수를 사이에 둔 채 만나지 못하는 견우와 직녀의 이야기는 하늘의 별, 즉 견우성(독수리자리의 알타이르)과 직녀성(거문고자리의 베가)에서 유래했다. 칠월칠석 즈음 밤하늘에 은하수가 남북으로 흐를 때 밝은 직녀성(0등성)은 밤하늘 천정에 높이 걸리게 되는데, 때마침 은하수를 사이에 놓고 견우성과 마주하게 된다. 까마득한 옛날, 사람들은 그런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견우와 직녀의 슬픈 사랑 이야기를 연상했던 것이다.
견우·직녀 설화가 언제 생겨났는지는 알 수 없다. 주(周)나라 때의 『시경(詩經)』에, 하늘에는 은하수 빛나는데 직녀성은 베의 무늬를 짜내지 못하고 견우성은 수레를 끌지 못한다는 내용이 나오지만 견우·직녀의 슬픈 사랑 이야기는 확인할 수 없다. 이후 늦어도 한나라 때가 되어서는 견우성과 직녀성이 한 쌍의 남녀로 엮이게 된다. 한 무제(武帝) 원수(元狩) 3년(기원전 120)에 장안(長安) 서남쪽에 곤명지(昆明池)라는 인공호수를 만들고 호수의 동서 양쪽에 각각 견우와 직녀의 석상을 세웠다고 한다. 곤명지는 황가 원림 상림원(上林苑) 안에 있던 여러 호수 가운데 하나로, 무제가 수군을 훈련시킬 목적으로 만든 곳이다. 당시 무제는 신독국(身毒國, 인도)으로 사자를 보내려는데 곤명(昆明, 윈난(雲南) 쿤밍)의 이민족이 이를 저지하자 그들을 정벌하기 위해 곤명지를 만들어 수전을 준비했다.
무제가 만든 곤명지는 둘레가 40리에 달했다고 한다. 이 곤명지의 동서 양쪽에 견우와 직녀의 석상을 서로 마주보게 세운 것은 하늘의 은하수와 견우성과 직녀성을 땅에다 구현한 것이다. 끝없는 은하수와 같은 곤명지 왼쪽에 견우가 있고 오른쪽에 직녀가 있었다고 한다.(한나라 때의 「서도부(西都賦)」) 수전을 위해 만든 곤명지 양쪽의 견우와 직녀 석상이 단순히 사랑하는 남녀로 간주되었던 것은 아니다. “7월 7일이면 하고(河鼓, 견우성)와 직녀 두 성신(星神)이 만난다”(한나라 때의 『사민월령(四民月令)』)라고 했는데, 견우와 직녀는 바로 별의 신으로 여겨졌다.
다양한 변주
오작교에 관한 내용도 한나라 때 등장하는데, 칠석날 직녀가 은하수를 건널 때 까치를 다리로 삼기 때문에 이때가 되면 까치 머리가 벗겨진다고 한다.(『풍속통의(風俗通義)』) 이후 견우·직녀 이야기에는 다양한 내용이 첨가된다. 은하수 동쪽에 천제(天帝)의 딸인 직녀가 베를 짜며 지내고 있었다, 혼자 지내는 직녀를 가엾게 여긴 천제가 은하수 서쪽의 견우에게 그녀를 시집보낸다, 그런데 시집간 직녀가 베짜기를 등한시한다, 화가 난 천제가 직녀를 은하수 동쪽으로 돌아가게 하고 일년에 한 번만 견우와 만날 수 있게 했다.(위진남북조시대의 『소설(小說)』) 여기서는 직녀가 베짜기라는 직분을 다하지 않은 것이 이별의 원인으로 말해지고 있지만 같은 시대에 나온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서는 견우 때문에 이별하게 되었다고 한다. 견우가 직녀를 아내로 맞으면서 천제에게 돈을 빌려 예물을 마련했는데 오래 지나도 갚지 않자 천제가 견우를 쫓아냈다는 것이다. 『소설』과 『형초세시기』 모두 노동과 자본을 통제·장악하는 천제가 존재하는데, 이는 당시의 시대상이 반영된 것이다.
이처럼 세월이 흐르면서 견우·직녀 설화는 매우 다양한 형태로 퍼져나갔다. 당나라는 견우·직녀 신앙의 전성기였다. 특히 당 현종은 칠석을 중시해서 백 척에 달하는 아주 높고 큰 걸교루(乞巧樓)를 궁중에 세워놓고 칠석이면 이곳에서 즐기며 밤을 새웠다고 한다. 칠석날을 위한 누각이 걸교루인데, 궁중뿐 아니라 민간에서도 뜰에다 누각을 세우고 등과 꽃과 채색 끈으로 장식해 걸교루로 삼았다. ‘걸교’란 교묘한 재주를 달라고 빈다는 의미인데, 칠석날 밤이면 여인들이 직녀성에게 바느질과 길쌈을 잘하게 해달라고 빌었다. 일찍이 한나라 때 궁녀들은 칠월칠석이면 개금루(開襟樓)에서 바늘귀가 일곱인 칠공침(七孔針)에 실을 꿰었다. 또 칠석날 밤에는 과과(瓜果, 박과에 속한 열매)를 차려놓고 바느질을 잘하게 해달라고 빌었는데, 거미가 그 열매에 거미줄을 치면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라고 여겼다. 칠석날의 주인공은 물론 직녀와 여성이지만, 남자들도 칠석날이면 붓·벼루·종이·먹을 차려놓고 견우에게 총명함을 빌었다.
칠석날 장생전에서
칠석날은 이처럼 바느질 솜씨와 총명함을 비는 날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연인들이 사랑을 맹세하는 날이다.
“칠월 칠일 장생전(長生殿)에서, 인적 없는 깊은 밤 은밀히 속삭였지. 하늘에서는 비익조(比翼鳥)가 되길 원하고, 땅에서는 연리지(連理枝)가 되길 원한다고.” ― 백거이(白居易)의 「장한가」
현종과 양귀비의 슬픈 사랑을 읊은 「장한가(長恨歌)」에서 두 사람이 사랑을 맹세한 날이 바로 칠월칠석이다. 날개가 하나씩밖에 없어서 암수가 하나가 되어야만 날 수 있는 비익조, 두 나무의 가지가 맞닿아서 결이 통하여 마침내 하나의 나무가 된 연리지. 비익조와 연리지가 되자고 맹세한 두 사람은 결국 안녹산(安祿山)의 난으로 인해 이승과 저승으로 갈라지게 된다. 「장한가」에서 양귀비를 잊지 못한 현종은 방사(方士)에게 양귀비의 혼을 찾게 하고, 방사는 신선이 사는 산에서 양귀비를 찾아낸다. 그때 양귀비는 현종과 칠석날 단 둘이 맹세했던 내용을 방사에게 말해준다. 바로 비익조와 연리지가 되길 바란다는 맹세다. 현종과 양귀비의 이야기를 시로 읊은 게 백거이의 「장한가」이고 이를 산문으로 풀어쓴 게 진홍(陳鴻)의 「장한가전」이다. 「장한가전」에서는 양귀비를 찾아온 방사가 그녀를 만났다는 증거를 현종에게 제시하기 위해 둘만 알고 있는 이야기를 해달라고 하자 양귀비가 이렇게 말한다.
“천보(天寶) 10년(751), 저는 황상을 모시고 더위를 피해 여산(驪山)의 궁전에서 머물렀지요. 그날은 칠월 칠일,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밤이었답니다. 진(秦)나라 사람들의 풍속에서는 그날 밤 수놓은 비단을 걸어놓고 음식과 과과를 차려놓고 뜰에서 향을 피웠는데, 이를 걸교라 하고 궁중에서 아주 중시했지요. 그날 한밤중이 되자 시위들도 쉬러 가고 저 혼자서 황상을 모셨답니다. 황상께서는 제 어깨에 기대서신 채 하늘을 올려다보시면서 견우와 직녀의 만남에 감탄하셨지요. 우리 둘이 은밀히 맹세하길, 영원히 부부가 되길 바란다고 했답니다. 그리고 손을 잡고서 목메어 울었지요. 이 일은 오직 황상만이 알고 계십니다.” ― 진홍의 「장한가전」
어디 현종과 양귀비에게만 칠석이 특별한 날이었으랴. 『전당시(全唐詩)』에 ‘칠석’을 제목으로 한 시가 82수나 될 정도로 칠석과 견우·직녀는 당나라 문화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오늘날 우랑·직녀 전설은 중국의 국가급비물질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사실, 견우와 직녀 이야기는 동아시아 전역에 두루 전해져 내려온 친숙한 설화다. 평안남도 덕흥리 고구려 고분 벽화(408년)에도 견우와 직녀가 그려져 있다. 고구려 때 그 지역 사람들도 은하수를 사이에 둔 견우와 직녀 이야기를 믿었기에 무덤에 그 하늘의 모습을 그렸던 것이다. 전설 속에 담긴 인간 삶의 원형에 많은 이들이 공감하기에 이야기가 확산되고 여러 지역의 많은 이들이 그 이야기를 공유하는 것이리라. 문화는 다양한 방식으로 공유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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