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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상으로 읽는 중국신화 44] 황금 밧줄을 타고 지상으로 내려오다

 

  천신은 여전히 탐탁지 않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초제르으가 모든 시험을 성공적으로 끝냈으니, 체흐부버의 뜻대로 혼인을 허락할 수밖에. 그래도 딸이 머나먼 지상으로 내려가는데 그냥 보낼 수는 없는 일이라, 천신은 이런저런 선물을 준비한다. 금과 은으로 된 그릇도 주고, 아홉 가지 곡식의 종자와 가축들도 준다. 그런데 천신이 주지 않은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순무와 고양이이다. 순무는 지금도 리장의 나시족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지만 생육환경이 맞지 않으면 잘 자라지 않는다. 귀한 것이라서 천신도 순무 씨앗은 주지 않은 모양인데, 아버지가 주지 않는다고 해서 그냥 내려올 체흐부버가 아니다. 체흐부버는 땋은 머리 사이에 순무 씨앗을 숨겨 무사히 지상으로 갖고 왔다.

  천신은 또한 고양이를 주고 싶어 하지 않았다. 물론 천신이 고양이를 주지 않은 이유에 대해 책에서는 설명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지금도 리장의 골목길에서는 환한 햇살 아래 졸고 있는 귀여운 고양이들을 자주 만날 수 있고, 지붕 위에도 고양이 장식을 붙여 놓고 있으니, 나시족 사람들은 고양이를 많이 아꼈던 듯하다. 그런 고양이를 두고 그냥 내려올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체흐부버는 아버지의 눈을 피해 가축들 틈에 고양이를 들어가게 해서 지상으로 데리고 왔다.

 

[그림1] 돔바문자에 등장하는 고양이

 

[그림2] 돔바문자의 순무(좌), 리장의 순무(우)

 

  주고 싶지 않은 것들을 딸이 가지고 가버렸으니 이를 어쩌나, 다시 빼앗아 올 수도 없고. 속이 상했던 천신은 소심한 복수를 한다.

 

“너희들이 순무를 등에 지고 갈 때, 점점 무거워 질 것이다. 물에 넣고 익히면 물처럼 풀어져 버릴 것이다!”

 

실제로 순무는 일반 무와 비교해볼 때 상당히 무겁다. 우리나라의 강화도 순무 김치도 향긋하고 맛있지만, 금방 물러지기 때문에 오래 두고 먹을 수 없다. 순무의 그런 특징이 바로 천신의 복수 때문에 생긴 것이란다. 그뿐인가, 천신은 고양이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은 앞으로 새벽잠을 설치게 될 것이다. 고양이가 새벽만 되면 울 거니까!”

 

새벽에 울어대는 길고양이의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바로 고양이를 빼앗긴 천신의 복수 때문이라니, 흥미로운 이야기들이다.

  어쨌든 이런 우여곡절 끝에 체흐부버와 초제르으는 향백나무 횃불을 들고 천상에서 지상으로 내려가는 기나긴 길을 떠났다. 그러나 워낙 먼 길이었기에 내려오는 길이 순탄치 않았다. 별이 비처럼 쏟아지고 하늘이 밤처럼 어두워지면서 큰비가 내렸다. 둘은 향백나무 가지와 잎을 태우고, 짬바와 야크 버터를 바쳐 제사를 지내며 산과 강물의 신에게 길을 열어달라고 빌었다. 제사를 지내고 나니 하늘이 맑아졌고 그들은 다시 가축을 몰고 길을 걸었다. 은(銀) 산이 나오면 은 사다리를 만들어 미끄러운 길을 내려오고, 금(金) 산에서는 황금 밧줄을 만들어 타고 내려왔다.

 

[그림3] 불 위에 곡식과 향백나무 가지와 잎을 놓고 태워 연기를 피워올리는 모습을 묘사한 돔바문자. ‘초빠지’라 읽는다. 제사를 지낼 때 잎이 붙은 젖은 나뭇가지를 태우는 것인데, 지금도 티베트족이나 나시족 등 고대 강 계통의 민족은 제사를 지낼 때 곡식과 젖은 나뭇가지를 태워 연기를 피워 올린다. 그것이 ‘정화(淨化)’의 기능을 한다고 믿는다.

 

[그림4] 나시족 마을에서 정월에 지내는 ‘제천(祭天)’ 행사 때 나무를 태워 연기를 피워올리는 모습

 

[그림5] 가운데 줄을 보면, 은 산에서 초제르으가 은 사다리를 만들고 / 금 산에서 초제르으가 황금 밧줄을 만들어 / 그것을 타고 쥐나로로산에 내려오는 내용이 보인다

 

  그런데 이번엔 ‘하늘의 외삼촌’, 카즈리구쉬가 길을 막았다. 체흐부버와 초제르으가 데리고 가는 가축들을 빼앗으려 했고, 재앙을 주는 나무와 강물을 끌어다가 그들이 나아가는 길을 방해했다. 원래 체흐부버와 혼인하기로 했는데 초제르으 때문에 혼인이 깨져버렸으니 화가 날 법도 했다. 그는 체흐부버와 초제르으가 내려가는 길을 수시로 막으며 심통을 부렸다.

  앞에서 제주도의 <세경본풀이>를 소개하면서 자청비 신화가 나시족의 <초버트(창세기)>와 비슷한 모티프를 많이 공유한다고 했는데, 이 부분도 그러하다. <세경본풀이>에서 옥황상제의 아들인 문도령이 지상으로 내려와 자청비를 만나고, 둘이 함께 하늘로 올라가 옥황상제의 시험을 거친 뒤 혼인 허락을 받아낸다. 그런데 원래 문도령에게도 혼인할 여인이 있었다. 물론 그것은 문도령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인 옥황상제가 마음대로 정해놓은 것이었다. 지상으로 내려간 문도령을 불러다 ‘서수왕따님애기’라는 여성과 혼인을 시키려 했다. 하지만 문도령이 자청비를 만나는 바람에 서수왕따님애기는 졸지에 혼인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카즈리구쉬와 같은 처지에 놓인 것이다. 서수왕따님애기는 ‘막편지(청첩장)’를 불태워 물에 타서 마시고 방에 들어가 문을 닫아건 채 자리에 누워, 백일이 지난 뒤 새로 변한다. 하지만 카즈리구쉬는 적극적인 복수의 길로 나선다. 같은 상황이지만 다른 선택을 한 것이다. 카즈리구쉬는 체흐부버와 초제르으가 가는 길에 비를 퍼붓고 곡식을 훔쳐가며 가축을 병들게 하는 등, 여러 가지 방식으로 그들을 괴롭힌다.

  하지만 초제르으와 체흐부버는 결국 그 어려움을 극복했다. 하늘과 땅 사이에 솟아있는 높다란 쥐나로로산에 도착했을 때, 체흐부버와 초제르으는 사슴의 뿔과 고라니의 무릎 관절로 카즈리구쉬를 막아낸다. 수탉의 울음소리 또한 카즈리구쉬를 막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것들은 모두 샤먼의 상징물이다. 그들은 하늘과 땅의 통로에서 재앙을 가져오는 카즈리구쉬를 막아내고 무사히 지상으로 내려올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다. 아직 마지막 난관이 남아있다.

 

 

<참고문헌>

『나시족 창세신화와 돔바문화』(김선자, 민속원)

『제주신화, 신화의 섬을 넘어서다』(김선자, 북길드)

 

 

[그림2]의 (우), [그림4] 김선자 촬영

[그림1], [그림2]의 (좌) 『納西象形標音文字字典』(李霖燦 編著·和才 讀字·張琨 標音, 雲南民族出版社, 2001)에서 인용(필자 스캔)

[그림1]의 (우), [그림3] 『納西象形文字譜』(方國瑜 編纂·和志武 參訂, 雲南人民出版社, 1981)에서 인용(필자 스캔)

[그림5] 和士成 釋讀・和力民 翻譯·和發源 校譯, 『納西東巴古籍譯注全集・第24卷』(雲南人民出版社, 1999)에서 인용(필자 스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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