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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성어 다시 보기 19] 철면피(鐵面皮), 사욕을 위한 뻔뻔함 혹은 공평무사를 위한 강직함

 

  마스크가 생활필수품이 된 지 벌써 일 년 반이 되어간다. 지금은 익숙해졌지만 처음에는 호흡하기도 힘들고 상대방의 표정도 읽지 못해 답답한 점이 많았다. 특히 강의실에서의 대면수업 시 학생들의 반응을 확인하거나 소통하기 힘들 뿐만 아니라 예상치 못한 상황들을 맞닥뜨리기도 한다. 같은 공간에 있음에도 상대의 얼굴 전체를 보지 못한 채로 소통하는 것은 의외로 쉽지 않다. 마치 본 얼굴을 감춘 채 가면을 쓰고 만나는 상황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마스크 착용으로 가려진 표정

  사람의 얼굴, 특히 표정은 그 사람의 생각과 감정을 보여준다. 감정을 잘 숨기지 못하는 사람은 더더욱 그렇다. 얼굴이나 표정과 관련된 표현 중에 철면피(鐵面皮)가 있다. 철면피는 말 그대로 ‘쇠로 만든 낯가죽’이라는 뜻인데, 염치가 없고 뻔뻔스러운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다. 다른 표현으로는 흔히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고도 한다.

  철면피라는 말은 중국의 왕광원(王光遠)이라는 사람에게서 시작되었다. 당대(唐代)의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진사(進士)였던 왕광원은 당시의 관행대로 권세가와 고관들을 찾아가서 자신의 재능과 장점을 제시하며 자신을 이끌어 줄 것을 호소했다. 이 과정에서 원하는 대로 자신을 이끌어줄 사람을 만날 수도 있고 반대로 수모를 겪을 수도 있다. 원하는 바를 얻으면 다행이지만 수모를 당하면 깊은 좌절과 상심에 빠진다.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서 자신의 실력을 증명하기도 했지만 권세가의 비위를 맞추는 일도 감당해야 했다.

  그런데 당시 사람들이 보기에 권세가들의 마음을 얻기 위한 왕광원의 태도는 평범한 수준을 한참 넘어서서 놀랄 정도였다. 어떤 권세가가 습작으로 지은 시를 보고 왕광원은 ‘이백(李白)도 따라오지 못할 훌륭한 작품’이라고 치켜세웠다. 이처럼 듣기 좋은 말로 권력자의 비위를 맞추는 일은 실상 비일비재하다. 과장의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동서고금 흔한 일이다. 그런데 다음 일화는 좀 다르다.

 

 

자신을 위해 자처한 모욕

  술에 취한 권세가가 왕광원에게 채찍으로 때려도 되겠냐고 묻자, 그는 흔쾌히 허락했고 매를 맞았다. 이를 본 친구가 ‘자네는 수치도 모르는가?’라며 경악을 하자, 왕광원은 ‘이렇게 해서라도 출세길이 열린다면 나쁘지 않다’고 답했다. 이 일을 계기로 사람들은 ‘광원의 낯가죽은 철갑 열 겹을 두른 것처럼 두껍다(光遠顔厚如十重鐵甲)’라고 했고, 여기서 철로 두른 낯가죽, 즉 철면피라는 부정적인 표현이 나왔다.

  사람의 언행에는 가치관이 반영된다. 왕광원의 언행에는 출세를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가치관이 드러났다. 출세를 유일한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면 양심, 도덕, 사회통념, 자존감과 같은 기타의 가치는 모조리 잊어야 한다. 상대방의 무례와 비상식을 참고도 철갑을 한 겹도 아닌 열 겹이나 두르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왕광원이 굴욕을 참고 뻔뻔하게 대응한 것은 온전히 사욕(私欲)을 위해서였다.

  그러다가 왕광원이 살았던 당대를 지나고 송대(宋代)가 되면서 ‘부끄러움을 모르는 두꺼운 낯’을 뜻하는 철면(鐵面)에 전혀 다른 뜻이 더해지게 되었다.

  송대에 조변(趙抃, 1008~1084)이라는 사람은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라는 관직에 임명되었다. 전중시어사는 관리들의 비위행위를 조사하고 적발하는 감찰관이었다. 관계(官界)의 부정을 척결하겠다는 의지와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뚝심이 필요한 자리였다. 조변은 자신의 역할을 너무나도 충실하게 수행했다. 그는 비리를 저지른 자를 찾아내면 그 자가 황제의 총애를 받거나 귀족이거나 직책이 높거나를 불문하고, 심지어 황실의 외척이나 환관이라도 예외 없이 탄핵대상에 올리고 실제로 탄핵을 이끌어내었다.

 

 

공무를 위해 관철한 원칙

  조변이 탄핵한 인물에는 군사업무 최고 기관인 추밀원(樞密院)의 추밀사와 추밀부사, 나라의 재정담당 최고 기관의 수장인 삼사사(三司使), 황실의 문서작성 담당인 한림학사(翰林學士) 등이 포함되었다. 탄핵 대상 중 최고 관직은 당시의 재상이었다. 소위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이라는 재상을 탄핵하기 위해 그는 12번이나 상소를 올렸고, 결국은 그 재상을 해임시켰다. 그가 적시한 죄목은 ‘학식도 없고, 전문지식도 없으며, 당파를 조성하여 사익을 도모하고, 제 집안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며, 인명사고를 여러 차례 내었다’는 것이었다. 재상이 갖춰야할 학식, 인품, 도덕성 중 어느 하나도 없으니 나라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이다.

 

[사진1] 조변이 죽자 소식(蘇軾)이 쓴 묘비 <조청헌공신도비(趙淸獻公神道碑)>의 탁본 일부

 

  사람들은 원칙대로 엄중하게 임무를 수행하는 조변을 두고 ‘철면어사(鐵面御史)’라고 부르며 칭송했다. 철면어사라는 말은 조변의 관직인 관중시어사를 바꾼 것이었는데, 『송사(宋史)』에 실린 조변 전기에 보인다. 조변의 전기는 포청천(包靑天)으로 불리는 명판관 포승(包拯)의 전기와 한 조목에 기록되었는데, 포승과 조변은 모두 객관성과 엄중함의 대명사였다. 조변의 철면은 온전히 공평무사(公平無私)를 위한 것이었다. 이때부터 철면에는 권력에 굴하지 않고 철가면을 두른 듯 냉정하고 강직하다는 긍정적인 의미가 생겨났다.

  같은 표현이지만 왕광원과 조변의 철면은 각기 사욕추구와 공평함의 극단을 보여준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철면피라는 말에는 왕광원의 의미만 있고, 조변의 의미는 없다. 반면 중국의 철면피에는 상반되는 두 가지 뜻이 모두 있다. 고사성어 중에는 시대에 따라서 의미가 변하기도 하고 중국과 한국에서 다른 의미로 쓰이는 것들이 간혹 있는데, 철면피도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둘러보면 왕광원 같은 사람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지만 조변 같은 인물은 흔치 않다. 이는 사익을 뒤로하고 공적 가치를 실행하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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