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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의 도시와 시] 양양(襄陽)(3)

 

  고대 중국인들의 생애를 보면 지명과 관직명이 많이 등장한다. 어느 곳에서 무슨 관직을 했는지가 상세하게 나온다. 어디 출생이고, 어디서 누구를 만났고, 어느 지역의 관직을 지내다가 정치적인 사건에 휘말리면서 폄적을 당하자 관직이 바뀌어서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났고, 나중에 다시 수도의 어떤 관직으로 복귀했다 등등. 폄적과 복귀 다시 폄적의 과정을 몇 번 반복하다가 말년에는 어디에서 죽었는지까지 생애 전반에 걸쳐 나열된 지역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중국일주를 한 느낌이 들 정도로 동서남북을 종횡한다.

  그에 비하면 맹호연의 동선은 간단한 편이다. 관직을 지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관직의 편력이 없으니 발자취의 대부분은 고향 양양(襄陽)에 있고, 관직을 얻으려고 갔던 장안에 일부가 있다. 젊은 시절의 은거, 중년의 출세간(出世間), 다시 은거. 그의 생애는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정도로 단촐하다. 사람의 별칭에는 개성이 담긴다. 맹호연의 별칭은 맹양양이다. 고향이나 관직을 지냈던 지역명을 성씨 뒤에 붙이는 관례에 따른 것이다. 양양의 녹문산에 은거했기에 호(號)도 녹문거사(鹿門居士)이다. 단촐한 이력의 와중에 일관되게 양양을 담아낸 별칭까지, 양양의 홍보대사로 최적인 사람이 맹호연이다.

  이백(李白)은 ‘풍류로 이름난 맹호연을 좋아한다’고 했고, 두보(杜甫)는 ‘허름한 옷을 입고 긴 밤을 지낸 맹호연이 가엽다’고 했다. 이백이 멋있다고 한 맹호연은 초연하게 은거하던 젊은 시절의 모습이고, 두보가 가엽다고 한 맹호연은 늦은 나이에 관직을 구하려고 동분서주했지만 아무 성과 없이 실패한 후의 모습이다. 같은 사람을 보는 다른 시선이다. 그렇다면 맹호연은 정작 자신을 어떻게 보았을까.

 

 

멋있고 가여운 맹호연

 

<친구들과 현산에 올라 (與諸子登峴山)>

 

人事有代謝, 사람의 일이란 바뀌고 변하며,
往來成古今. 오고가는 세월은 역사가 된다.
江山留勝跡, 강산에 뛰어난 자취가 남아 있기에,
我輩復登臨. 우리는 또 산에 올랐다.
水落魚梁淺, 강물이 줄어들자 어량주(魚梁洲)가 드러나고,
天寒夢澤深. 날씨가 추워지자 운몽택(雲夢澤)이 깊어진다.
羊公碑尚在, 양공(羊公)의 비문이 여전히 남아 있어서,
讀罷淚沾襟. 읽고 나니 눈물이 옷깃을 적신다.

 

  맹호연이 여러 친구들과 현산(峴山)에 올라가서 쓴 시이다. 현산은 양양의 남쪽에 있는 산이다. 산에 올라오니 여름 내내 장마로 물이 불어 있다가 가을이 되자 수위가 낮아진 산 아래의 모래섬인 어량주와 소택인 운몽택이 보인다. 여름에서 가을로 향하는 계절의 변화 앞에서 고금의 역사와 인간사를 느낀다. 양공은 진(晉) 나라의 양호(羊祜, 221-278)을 가리키는데, 현산에 그를 기리는 비석이 있다. 양호는 당시에 양양과 형주(荊州)에서 오(吳) 나라와 벌어진 군사대치 중에 공을 세웠다. 양호가 죽자 양양 사람들이 그의 훌륭한 인품과 공적을 기리기 위해서 현산에 사당을 짓고 비를 세웠는데, 비를 보는 사람들이 감동하여 모두 눈물을 흘렸다고 하여 타루비(墮淚碑)라고 불렀다.

 

[사진1] 현산의 타루비

 

  비석 앞에서 맹호연도 눈물을 흘렸다. 그의 눈물은 양호의 행적에 대한 감동 이상에서 나온 것이다. 평생 은거를 했던 맹호연은 내세울만한 업적이 없으니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못할 자신의 처지가 양호와 대조되어서 슬픈 것일 수 있다. 혹은 지금 친구들과 산에 올랐지만 세월이 지나면 우리의 존재가 기억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에서 슬픈 것일 수도 있다. 눈물은 자신의 일생을 돌아본데서 나왔다. 역사 앞에 이름 없이 사라질 자신의 존재, 나아가 평범한 대다수 인간의 존재를 생각하니 절로 눈물이 흘렀다.

 

 

금기 음식과 죽음

  장안에서 돌아온 후에 맹호연은 줄곧 고향에서 지냈다. 그러던 중에 병이 났다. 등에 종기가 생기는 등창은 발병하면 잘 낫지 않는 병이었다. 간신히 병이 나아가던 중에 친구 왕창령(王昌齡)이 찾아왔다. 오랜 질병 끝에 찾아온 친구는 반가울 수밖에. 두 사람은 식사를 하고 회포를 풀었다. 양양에는 양자강의 지류인 한수(漢水)가 흐르는 덕에 해산물이 풍부했다. 그런데 등창에 걸렸을 때 먹으면 안 되는 음식이 해산물이었다. 맹호연은 이날 해산물을 먹었고 결과는 가혹했다. 병이 도로 심해졌고 오래지 않아 그는 세상을 떠났다.

  맹호연이 죽은 후에 왕유(王維)가 맹호연을 만나기 위해서 양양으로 왔다. 친구의 죽음을 몰랐던 왕유는 슬픔과 허탈함을 시로 써냈다.

 

<맹호연의 죽음에 통곡하다(哭孟浩然)> 왕유

 

故人不可見, 친구는 보이지 않고
漢水日東流. 한수(漢水)는 날마다 동쪽으로 흐른다.
借問襄陽老, 양양의 노인에게 불어보니
江山空蔡洲. 채주(蔡洲)의 강산이 비었다고 하는구나.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친구의 죽음, 이제 그를 볼 수 없다. 한수가 흘러가서 되돌아오지 않듯이 친구도 다시는 오지 않는다. 채주는 한수에 위치한 곳인데, 양양의 다른 표현이다. 강산이 비었다는 것은 맹호연의 부재이자, 왕유에게 양양이라는 곳의 의미 상실이다.

  일면식도 없는 맹호연의 죽음 앞에서 필자도 안타까움이 밀려온다. 만일 해산물을 먹지 않았다면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을 텐데, 맹호연도 먹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을 텐데 왜 그랬을까. 병이 거의 나아갈 즈음이어서 방심한 것일까, 친구의 방문으로 기분이 좋았던 것일까. 답 없는 질문만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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