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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사와 문화의 이모저모 9] 왕망의 등극은 찬탈인가, 선양인가?

 

[사진1] 미앙궁 전전

 

 

불안한 왕위 계승

 

“신첩의 죽음은 천명이 아니옵니다. 다른 첩들이 저주하여 저를 죽게 만든 것입니다.”

 

  기원전 54년, 태자 유석(劉奭)이 사랑하는 여인이 병사하면서 남긴 말이다. 이후 태자는 모든 여자를 멀리했다. 황실의 대가 끊길까 걱정된 선제(宣帝)는 서둘러 태자의 짝을 맺어주게 했다. 황후는 다섯 여인을 부른 뒤 태자에게 한 사람을 선택하게 한다. 태자가 무심하게 지목한 한 여인, 그저 태자와 가장 가까운 곳에 앉아 있었기에 선택된 이 여인은 왕정군(王政君)이다. 태자와의 하룻밤 동침으로 임신한 그녀는 아들을 낳는다. 너무도 기쁜 선제는 손자 유오(劉驁)에게 태손(太孫)이라는 자(字)를 지어주었다. 이때가 기원전 51년이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성제(成帝, 유오)는 마흔다섯에 세상을 뜬다. 그해(기원전 7)에 왕정군의 나이는 예순다섯이었다. 혼인하던 날 이후로 남편 원제(元帝, 유석)는 왕정군을 다시 찾지 않았다. 아들만 바라보고 살았는데 아들은 자식도 남기지 않은 채 세상을 뜬 것이다. 성제에게 자식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다들 너무 일찍 죽어버렸다. 방계로 제위에 오른 애제(哀帝)는 스물다섯에 갑자기 세상을 떴는데, 그 역시 자식이 없었다. 애제의 뒤를 이어 방계로 제위에 오른 아홉 살의 평제(平帝)는 불과 열넷에 죽었다. 평제의 후계자로 정해진 유영(劉嬰)은 겨우 두 살이었다. 너무 어려서 즉위하지 못한 채 황태자로 지내던 유영은 결국 황제의 자리를 빼앗기고 만다. 제위를 빼앗은 사람은 바로 왕정군의 조카 왕망(王莽)이다.

 

 

징 조

  전통 관념에서 보자면, 왕씨가 유씨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찬탈’이다. 그런데 정작 당시에 왕망의 황제 등극은 천명(天命)으로 간주되었다. 수많은 관리와 백성이 왕망에 환호했다. 왕망이 ‘자연스럽게’ 황제로 등극할 수 있었던 데는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과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에 휩싸였던 전한(前漢) 시대의 사회 분위기가 한몫했다.

  원제 때는 “우물물이 넘쳐 밥 짓는 연기가 꺼지며, 옥당(玉堂)에 흘러들어가고 금문(金門)에 흐르네”(『한서』 「오행지」)라는 노랫말이 전해졌다. 우물물은 음(陰), 연기는 양(陽)에 해당한다. 옥당(궁전)과 금문(궁문)은 황제의 거처를 상징한다. 물이 불을 끄고 옥당과 금문에 흐른다는 것은, 음이 성하여 양을 소멸시킨다는 의미다. 이는 화덕(火德)의 한나라가 망하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원제 초원(初元) 4년(기원전 45)에는 왕정군의 증조부 왕백(王伯)의 묘문(墓門) 가래나무(梓) 기둥에 갑자기 나뭇가지와 잎이 생겨나더니 사방으로 무성히 자라났다고 한다. 이 일은 왕씨가 창성해져 한나라를 대신할 징조로 여겨졌다. 초원 4년은 왕망이 태어난 해다. 훗날 왕망은 이 일을 두고 ‘문’은 연다는 뜻이고 ‘가래나무’는 자손을 의미-재(梓)와 자(子)는 중국어 발음이 ‘쯔’로 동일하다-하니, 기둥 같은 대신(大臣)의 지위에서 흥기해 천명을 받고 왕이 될 길조였다고 풀이했다. 성제 때는 “계수나무 꽃이 열매를 맺지 못하고, 황작(黃雀)이 그 꼭대기에 둥지를 트네”(『한서』 「오행지」)라는 노랫말이 전해졌다. 계수나무는 붉은색으로 한나라를 상징하는데, 그 꽃이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은 후사가 끊어질 것을 의미한다. 황작은 왕망을 상징하는데, 훗날 왕망이 세우게 되는 ‘신(新)’이라는 나라가 바로 황색을 숭상했다.

  왕망은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가난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런 그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성제가 즉위하자마자 왕정군의 오빠 왕봉(王鳳)이 대사마가 되어 국정을 장악하게 되는데, 왕망이 바로 백부인 왕봉의 마음을 얻게 된 것이다. 왕봉이 중병에 걸리자 왕망은 그를 지극정성으로 간호했고 이를 계기로 왕봉의 추천을 받아 황문랑(黃門郞)이라는 관직을 하사받는다. 이때가 기원전 22년, 왕망의 나이 스물넷이었다. 왕망은 관직에 나간 이후로도 겸손함과 검소함을 잃지 않았고, 그에 대한 왕씨 집안의 신임은 날로 두터워졌다. 기원전 8년에는 당시 대사마(大司馬)이던 왕근(王根)이 중병에 걸리자 자신의 후임으로 조카인 왕망을 추천한다. 이렇게 해서 왕망은 서른여덟에 대사마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황작이 계수나무 꼭대기에 둥지를 틀 날이 착착 다가오고 있었다.

  평제가 제위에 오른 원시(元始) 원년(서기 1년) 정월, 남쪽 먼 나라에서 한나라에 흰 꿩을 바쳤다. 일찍이 주(周)나라 성왕(成王) 때도 이런 일이 있었다. 주공(周公)이 어린 성왕을 도와 섭정하자 천하가 태평하여 이웃나라에서 앞을 다투어 조공을 바쳤는데, 월상씨(越裳氏)에서 흰 꿩을 바쳤다고 한다. 평제가 제위에 오른 해에 흰 꿩을 바친 나라도 바로 월상씨다. 이는 아주 특별한 역사적 상징이었다. 대신들은 왕정군에게 상주하길, 왕망이 새 황제를 옹립해 조정을 안정시켰으니 그에 걸맞은 상을 내려야 한다고 했다. 또한 주공 때 먼 나라에서 흰 꿩을 바쳐온 상서로움이 왕망의 공덕으로 인해 다시 생겼다면서, 왕망에게 ‘안한공(安漢公)’이라는 칭호를 하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원시 4년에는 안한공 왕망에게 재형(宰衡)이라는 직함이 더해진다. 재형은 주나라 성왕을 보좌한 태재(太宰) 주공과 상나라 탕왕을 보좌한 아형(阿衡) 이윤(伊尹)의 칭호를 합한 것이다.

  과연 왕망은 이윤과 주공처럼 평제를 잘 보좌했을까? 평제는 열넷에 죽고 마는데, 일설에 의하면 왕망이 그를 독살했다고 한다. 왕망이 과연 자신의 사위인 평제를 죽였는지는 알 수 없다. 아무튼 왕망은 왕위 계승 후보자들 가운데 두 살배기 유영을 황태자로 옹립했다. 유영이 황태자로 옹립된 달, 매우 공교로운 징조가 나타났다. 맹통(孟通)이라는 자가 우물을 파다가 흰 돌을 얻었는데, “안한공 왕망에게 고하니 황제가 되라”는 구절이 적혀 있었다. 하필(혹은 마침) 바로 그때 이런 징조가 나타난 것이다. 왕망은 ‘가(假)황제’ 즉 대리 황제가 되었다. 다들 왕망을 ‘섭(攝)황제’라 불렀고, 연호는 거섭(居攝)으로 정해졌다.

  거섭 3년(8년), 왕망이 천명을 받들어 제위에 올라야 한다는 징조를 알리는 소식이 곳곳에서 전해졌다. 제군(齊郡)에서 전해진 소식에 따르면, 천제(天帝)의 사자가 꿈에 나타나 “섭황제가 진짜 황제가 되어야 한다”라고 말하면서 이 말에 대한 증거로 우물이 생겨날 것이라고 했는데 정말 다음날 아침 백 척(尺) 깊이의 우물이 생겨났다. 이어서 석우(石牛)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파군(巴郡)에서 전해지고, 선석(仙石)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부풍(扶風)에서 전해졌다. 애장(哀章)이라는 자는 왕망이 진짜 천자이니 황태후(왕정군)는 하늘의 뜻에 따르라는 내용이 담긴 문서를 위조하기도 했다. 애장은 위조한 문서를 구리 궤짝에 넣은 뒤 고제(高帝, 한 고조)의 사당으로 가져가 복야(僕射)에게 전했다. 소식을 전해들은 왕망은 고제의 사당으로 가서 그것을 갖고 돌아온 뒤 미앙궁(未央宮) 전전(前殿)에서 조서를 발표했다. 천명이 신령한 계시를 내려 천하 백성을 자신에게 맡겼으니 어찌 감히 그 명을 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제 천자의 자리에 올라 국호를 ‘신(新)’으로 정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왕망은 어린 황태자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일찍이 주공은 왕위를 대신하다가 마침내 권력을 성왕에게 돌려줄 수 있었거늘, 지금 저는 하늘의 엄한 명령을 받아 뜻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난신적자, 위군자인가?

  일찍이 주공이 되길 자처했던 왕망은, 황제로 즉위할 즈음에는 요(堯)가 순(舜)에게 선양한 사례를 모델로 삼았다. 순을 조상으로 둔 자신이 요를 조상으로 둔 한나라로부터 제위를 선양받았다는 것이다. 왕망에게 선양할 수밖에 없었던 전한의 마지막 황태자 유영은 이후 어떻게 됐을까? 왕망은 다섯 살의 유영을 감금시킨 채 어느 누구와도 말하지 못하게 했다. 유영은 결국 육축(말·소·양·돼지·개·닭)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바보가 되고 만다. 그리고 25년, 유영은 갱시제(更始帝) 유현(劉玄)의 승상 이송(李松)에게 죽임을 당한다.

  왕망은 유영보다 먼저 세상을 떴다. 23년, 녹림군(綠林軍)이 장안(長安)으로 쳐들어와 미앙궁을 불태우고 왕망을 죽인 것이다. 반란군이 들이닥쳤을 때도 왕망은 “하늘이 나에게 덕과 사명을 주셨으니 저들이 나를 어찌하겠느냐!”(일찍이 공자가 위험에 처했을 때 이런 식으로 말한 바 있다)라며 헛된 희망을 품었다. 마지막 남은 병사들과 함께 미앙궁 점대(漸臺)로 가서 화살이 떨어질 때까지 버티던 그는 결국 두오(杜吳)라는 장사꾼의 손에 죽었다. 반란군은 왕망의 시신을 갈기갈기 찢었다. 왕망의 머리는 갱시제에게 보내져 길거리에 내걸렸다. 왕망의 혀를 잘라 먹는 사람까지 있었다.

  왕망의 일생을 보면, 그가 유가의 성인을 모델로 삼고 유가의 이론을 실천에 옮기고자 했던 것은 분명하다. 유가적 유토피아를 추구했던 그는 토지의 겸병을 막고자 정전(井田)제도를 시행했고 노비의 매매를 금지하는 등 많은 개혁 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기득권 세력은 그의 정책에 반대했고, 당시의 생산력으로는 그의 정책을 현실화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메뚜기 떼와 가뭄 등 자연재해가 잇달았고 기근은 반란을 불러일으켰다. 결과적으로 왕망은 철저히 실패했다.

  역대로 왕망에 대한 평가는 위군자(僞君子), 난신적자(亂臣賊子)였다. 왕망이 건국한 ‘신’은 유씨 왕조인 전한과 후한 사이에 끼어 있다. 혈통이 정통성을 담보하던 시대의 프레임이 그를 찬탈자·위군자·난신적자로 규정한 게 아닐는지. 후스(胡適)는 이제껏 그 누구도 왕망에게 공평한 평가를 내리지 않았다며 그를 중국의 첫 번째 사회주의자라고 했다. 왕망은 분명 오늘날 우리에게도 문제적인 인물이고, 한 번쯤 꼼꼼히 들여다봐야 할 인물임에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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